[우주; 별의 거주지].
B는 책을 집어 들었다. 작가의 이름이 에린에서 흔히 볼 단어는 아니다. 아마 밀레시안이겠지. 예상대로 책의 앞장에서는 이 책의 내용이 에린이 아니라 그가 왔었던 본래의 세계를 담고 있다고 소개했다. “우리는 저 하늘, 우리가 눈에 담는 곳보다도 더 높은 고도, 생명이 숨쉴 수 없는 별의 거주지를 우주라고 규정했다.” 썩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B는 비록 이곳에서 실용적이지 않은 지식이라도 기꺼이 받아들일 용의가 있었다. 그야 흘러넘치는 시간이지 않은가. 그는 여상하게 책장을 넘긴다.
저자는 낭만이 섞인 문체로 법칙과 존재를 설명했다. B는 아마 영영 볼 일도 없을 세계의 법칙, 행성 몇 개의 이름과 특성을 훑었다. 에린과 썩 유사한 곳이다. 달이 하나라는 점을 제한다면. 그러고 보면 G의 본래 세계는 어땠을지 잠시 생각하다가 그는 독특한 내용에 시선을 멈춘다. 수명이 다한 별: 블랙홀. 별이 긴 생명을 마침내 멈춰 폭발한 흔적. 다른 별도, 운석도, 심지어는 공간과 빛조차 안으로 끌어들여 삼켜버린다…. 그 안쪽은 왜곡되어 있다고 추측된다. 섬뜩한 설명에서 B는 도리어 무언가를 연상한다. 기록된 자신이라거나, 과거 따위를.
그는 크로우 크로아흐를 불러낼 적의 자신을 생각했다. 예컨대 그 무렵의 B는 G을 제 이해로 끌어들이려는 일종의 블랙홀은 아니었나 하는 것이다. 고대의 용을 소환하는 일은 당시의 그에게도 퍽 버거운 일이었다. 굳이 강행했던 이유는 별다르지 않다. B는 꼭 타인의 일을 읽듯 되짚었다. 아마도 시험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G을. 누구보다 고결한 영웅이리라 기대한 그대를.
…무엇을 시험했나? 그는 이제와서야 생각하기를, 아마도 자신은 영웅의 이해를 바랐으리라. 본래 요정왕의 가호가 없었다면 벌어졌을 수많은 희생과 비명, 원망과 안도, 그 모든 것들을 뒤로하고 마침내 용을 쓰러트린 영웅에게 쏟아졌을 박수갈채로 하여금. 고결한 영웅인 그 또한 결국은 같은 깨달음을 가지고 이해를 공유하고 말기를. 그러니 자신을 블랙홀로 비유하기에 조금의 모자람도 없다.
그는 조금은 냉정한 평가를 그 스스로에게조차 한치의 예외 없이 적용하고는 별 미련 없이 객체를 넘겼다. 그렇다면 G은 어땠을까. 이를 모를 리 없었던 영민한 영웅은. 제 예상을 한참은 뛰어넘어 샛별의 빛을 발하던 그대는 정말이지 이조차도 상관없었단 말인가? 그는 애달픈 얼굴로 제게 사랑을 말하던 남자를 떠올렸다. 꽃 대신 칼을 들어 올린 고백.
그는 구태여 혼자 고민할 필요가 없다.
“내가 밉지 않았나?”
바람이 선선하게 불고 꽃잎이 하늘거리는 날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G은 여상한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곱씹고는 깜짝 놀라 몸을 떨었으나 B는 여전히 책을 읽고 있었다. 꼭 자신이 착각하기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G은 이제 그럴 리 없다는 것을 안다. 그는 생각하듯 잠시 침묵하다가 책장이 세 번 넘어가고서야 입을 열었다.
분명히, 그랬던 적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 지금도 어쩌면 남아있을지도 몰라. 하지만 미움도 슬픔도 또한 시간의 물결에 흘러 퇴색되는 것. 마모되지 않은 감정은 오직 형체 없는 불길 뿐.
"내가 너를 미워하고 원망하는 것이 과연 나를 지키는 일이었을까?“
G은 손을 뻗었다. B의 목 쪽, 조금은 길어 살랑이는 머리카락에 살짝 닿는다. 그는 머뭇거리듯 손끝을 찰나 멈췄다가 이내 조금 더 움직였다. 살결을 문지르는 감촉은 보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삶의 주인은 뜻 모를 표정으로 약하게 눈을 내리깔았고 그러다가도 고개를 들어 똑바로 상대를 응시했다. 흔들림 없는 표정이 굳건하다. B는 그것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부동의 흔적을 찾아낸다.
뛰지 않는 맥을 짚는 듯 혹은 조르는 듯.
“내 마음은 여기에 있어.”
G은 직후 제사를 지내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빈 무덤에 향초를 올렸다. 형태만이 남은 진혼과 위로는 사실 그가 차마 아무것도 묻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마음은 이미 그 자신을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제 손안에 없는 것을 넣을 순 없다. 마음은 이미 네게 건넸다. 움켜쥔들 허공이고 부순들 공백이라. 그는 사랑을 그만둘 수도 너를 잊을 수도 없었고 그저 빈 가슴에 앓으며 지냈다.
사랑이 무릇 그렇듯이.
그런 말을 들은 B는 문득 제가 읽고 있던 책의 표지를 쓸었다. 중반 즈음에 이르러서는 저자는 수많은 별의 이름과 그 설화를 논하고 있었다. 그는 슬 질려가던 참이었다. 그토록 많은 별들에 일일이 이름을 붙이는 것 따위가 과연 의미 있는 일인가? 별의 탄생과 움직임, 폭발, 그러한 현상들 따위에? 그는 가치란 유일에 있다고 믿었다. 그는 언제나 재단하고 가늠했으나….
그러나 B는 G의 그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이 책을 이해한 기분이 들었다. 가치란, 실은, 의미가 아니라 실존에서 온다. 존재의 아름다움에 필연적으로 이끌렸던 행자들처럼, 도무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빼앗겨서는…, 그야 그도 그렇지 않던가. B 또한 G에게.
그래 그가 인정하기를 이제는 그 마음 또한 제게 없다. 그대가 그대의 마음을 가해자 없이 빼앗긴 것처럼, 그대의 원망조차 불가항력에 덮인 것처럼. 제가 그대를 기꺼워하지 않을 도리는 없다. 설사 그대가 이제부터 자신을 몇 번을 실망시킨대도, 그렇대도……
…… …….
그는 문득 자신의 오만을 깨달았다. 감정을 주겠다니 이 얼마나 무지한가? 그것은 그저 필연적으로 이끌리는 것, 저항할 수조차 없이, 마치 행성 간의 인력처럼. 속절없이 그대를 축으로 삼아 맴도는 것.
사랑이란 주는 것이 아니라 건네지는 것이고, 곁에 있으면서도 끊임없이 그리운 이유는 제 마음이 이미 그대에게 있기 때문이다. 이미 존재해왔던 법칙을 그는 마치 그제야 처음 관찰한 학자처럼 낯설게 발음했다.
소유하지 않은 마음을 통제할 수는 없다. 그는 언제든 그만둘 수 있다는 듯이 굴었으나 실은 그렇지 않았고, 아마도 그는, 영영 돌려받지 못하겠지. 설령 G이 그를 떠난다 하더라도. 그러나 그것이 썩 나쁜 기분은 아니라서 그는 그저 웃었다. 이유 모를 웃음에 G이 이상한 표정을 지을 때까지.
숨어있던 별을 발견하고선 환희에 찬 행자처럼, 사무침을 견딜 수 없어진 이야기처럼, 그는 그제야 제가 가누지 못하게 된 감정들에게 이름을 붙였다. 언제나 존재했지만 새삼 새로운 것들에게. 빛에 선을 그으면 그 가운데에는 누구보다 환한 별이 있어, 분명히, 감정들은 이 별에게 이끌리고 만 것이겠지. 그 모든 것들. 개별의 각각에 이름 지어진 것들이라도 맞붙은 무리에 명명할 이름은 도무지 ◼◼ 외에는 없을 터다.
가장 밝게 빛나는 별, 소울스트림을 건너 도달한 여행자. 에린의 영웅, 그리고, 이미 자신의.
B는 마지막 한 조각을 명명하지 않은 채 책장을 넘긴다. 그의 안에서 무엇이 소용돌이쳤든 그의 낯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하다. 그리고 실로 그러하듯이, 일련의 문답 외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고, 책은 이미 후반을 달려 나가고 있었다.
은하란, 항성과 성간 물질 등이 중력에 의해 묶여 이루는 거대한 천체의 무리이다. 이 항성들은 모두 은하의 중심을 공전한다…… .
/공백 포함 3,569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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